1856년 슈만이 정신병원에서 죽은 후 브람스는 시간을 쪼개 자신이 창단하여 지휘하던 여성 합창단이 있던 함부르크와 궁정 음악 교사이자 지휘자로 재직하던 데트몰트 두 곳에서 일했다. 그는 1862년 처음으로 빈에 방문하여 겨우내 머무르다가 1863년 빈 음악학원의 지휘자로 임명되었다. 다음 해에 사직하고 다른 지휘자 자리를 알아보게 되었지만, 그는 빈에서 살면서 점차 이곳이 자신의 집이 되었다. 1872년에서 1875년 사이 그는 빈 악우협회(Gesellschaft der Musikfreunde)의 연주회 감독을 지냈고, 그 뒤로는 공식 직위를 가지지 않았다. 그는 187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명예 박사 학위를 거절했으나, 1879년 브레슬라우 대학의 학위는 받았다. 이때, 감사의 표시로 작곡한 작품이 대학 축전 서곡이다.
브람스는 1850년대와 1860년대 내내 꾸준히 작곡했으나 비평받았으며, 피아노 협주곡 1번은 초기 몇몇 공연에서 나쁜 평가를 받았다. 리스트와 리하르트 바그너를 위시한 "신독일 악파"에서는 그의 작품을 구시대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브람스는 몇몇 바그너의 음악 작품에 감동하였으며, 리스트를 위대한 피아니스트로 인정했으나, 브람스파와 바그너파로 갈려 갈등을 빚었고, 이 대립이 유럽 전역의 음악계로 퍼져나갔다. 브람스파로는 그의 친우들인 클라라 슈만, 음악계 명사 에두아르트 한슬리크, 빈의 외과 의사 테오도르 빌로트가 있었다. 1860년 브람스는 그들 음악의 지나침에 대해 강령의 형태로 요아힘과 함께 반박문을 올렸지만 이 글을 너무 일찍 발간하여 세 명의 지지 서명밖에 얻지 못해 실패로 끝났으며, 이후로 브람스는 다시는 대중 논쟁에 끼지 않게 되었다.
1868년 브레멘에서 그의 최대 합창곡 작품인 독일 레퀴엠의 초연이 있었는데, 이때부터 브람스는 전 유럽에 명성을 얻게 되었고, 많은 이들은 그가 슈만의 예언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그는 용기를 얻어 오랜 세월 동안 씨름하던 칸타타 리날도, 첫 현악 4중주, 세 번째 피아노 4중주, 또 가장 유명한 교향곡 1번 등 여러 작품을 완성하게 되었다. 브람스 교향곡 1번은 1876년에 나왔지만, 1860년대 초부터 시작한 것이었다. 다음 교향곡 2,3,4번은 각각 1877년, 1883년, 1885년에 완성되었다. 1881년부터 그는 당시 한스 폰 뷜로가 지휘자로 있던 마이닝겐 공작의 궁정 교향악단을 위한 새 교향악 작품을 쓰기 시작하였다.
1889년에는 발명가 토머스 에디슨이 보낸 테오 방게만(Theo Wangemann)이 빈에 있던 브람스를 방문하여, 실험 녹음을 권유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피아노곡 첫 헝가리 무곡의 축약본을 연주했다. 이 녹음은 나중에 LP판으로 나왔다. 앞부분에 이 작품을 소개하는 목소리는 꽤 깨끗하게 녹음되었지만 피아노 연주 소리는 잡음이 심해 잘 들리지 않았다. 분석자들과 학자들 사이에 이 녹음의 육성의 주인이 브람스인지 방게만인지 논란이 있지만, 이것은 주요 음악가가 남긴 최초의 녹음이 되었다.
1890년 57세의 브람스는 작곡을 포기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생각을 고쳐 죽기 몇 년 전에 수많은 명작을 내놓았다. 그는 마이닝겐 오케스트라의 클라리네티스트 리하르트 뮐펠트에 감탄하여, 클라리넷 3중주 Op.114, 클라리넷 5중주 Op.115(1891년), 두 클라리넷 소나타 Op.120(1894년)를 작곡했다. 그는 피아노 곡 Op.116~119와 네 개의 엄숙한 노래(Vier ernste Gesänge) Op.121(1896년), 11개의 코랄 전주곡 Op.122(1896년)도 썼다. 특히, Op.121 곡을 완성할 때 그는 간암이 매우 악화되어 있었다. 그의 상태는 간 건강이 가장 나빠져 1897년 4월 3일에 간암으로 숨을 거두었고 빈의 첸트랄프리드호프에 묻혔다.
브람스는 네 곡의 교향곡, 세레나데, 두 곡의 피아노 협주곡, 한 곡의 바이올린 협주곡, 바이올린과 첼로 이중 협주곡 한 곡, 관현악 서곡 등 수많은 관현악 작품을 남겼다.
그의 대작 중 독일 레퀴엠은 전례상의 장송 미사(Missa pro defunctis)의 내용이 아니라 브람스가 루터 성서에서 고른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작품은 그의 일생에서 세 번에 걸쳐 작곡되었는데. 2악장의 초기 판본은 로베르트 슈만이 자살한 지 얼마 안된 1854년에 작곡한 것이고 나중에 피아노 협주곡 1번에 쓰였다. 레퀴엠의 대부분은 1865년 어머니가 죽은 뒤에 작곡하였다. 5악장은 1868년 공식 초연 이후에 덧붙인 것으로, 작품 출판은 1869년에 하였다.
브람스의 변주곡 작품으로는 슈만 주제에 의한 변주곡, 헨델 주제에 따른 변주곡과 푸가, 파가니니 변주곡 그리고 하이든 주제에 따른 변주곡이 있다. 실내악곡으로는 현악 4중주 세 곡, 현악 5중주 두 곡, 현악 6중주 두 곡, 클라리넷 5중주, 클라리넷 3중주, 호른 3중주, 피아노 5중주, 피아노 4중주 세 곡, 피아노 3중주 네 곡(4번은 작품번호가 없다)이 있다. 그는 피아노가 반주하는 독주 소나타도 많이 썼는데, 바이올린 소나타 세 곡, 첼로 소나타 두 곡, 클라리넷 소나타 두 곡(이 두곡은 본인이 비올라 소나타로 편곡함)이 있다. 또 피아노 독주곡으로는 초기의 피아노 소나타와 발라드에서 나중의 소품 모음집 등 다양하다. 브람스는 가곡(Lied)에서도 중요한 작곡가로서 200곡이 넘는 가곡을 썼다. 또 오르간 연주자의 중요한 레퍼토리인 오르간 합창 전주곡(chorale preludes) Op.122는 그가 죽기 직전에 쓴 곡이다.
절대 음악의 신봉자였던 브람스는 음악에서 특정한 묘사나 이야기를 배제하였고, 오페라와 교향시를 전혀 쓰지 않았다.
진지한 음악가란 평을 받고 있는 브람스는 흔히 크고 복잡한 음악 구성을 보이는 작품이 많이 있지만, 생전에 유명해져 상업적으로 성공한 일부 작품 중에는 대중의 기호에 맞게 당대의 번성하던 음악 시장에 어울리는 곡도 있다. 20세기 미국의 영향력 있는 비평가 B.H. 하긴은 브람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를 거부하고 자신의 여러 녹음 음악 안내서에서 브람스는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작품에서 인기를 얻었지만, 규모가 더 크고 진지한 음악에서는 그에 미치지 못했다고 주장하였다. 브람스가 쓴 이런 류의 가벼운 곡으로는 춤곡집(헝가리 무곡 왈츠 Op.39 피아노 연탄곡, 성악 4중창과 피아노의 "사랑의 노래 왈츠"(Liebeslieder Waltzes), 몇몇 성악 작품들이 있는데 친구 베르타 파버의 아들이 태어난 것을 축하하기 위해 '자장가'가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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